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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L Acoustics M88
레트로 진공관 앰프, 그 자연스러운 음악에 취하다
글 코난 2018-03-01 |   지면 발행 ( 2018년 3월호 - 전체 보기 )




나는 인적이 드문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학교라도 갈라치면 아침 일찍 일어나 5km 정도를 걸어 내려가야 했다. 지금도 명절에 내려가 보면 분명 지도상으론 남쪽으로 내려갔지만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그만큼 고도가 높아서 한때는 가을 수박을 재배하는 마을 주민들도 있었다. 시끄러운 도시에 있다가 시골에 내려가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게 맑은 공기, 그리고 또 하나는 조용한 사방의 분위기다.
평소 도시에서 사방이 막혀 있는 건물 내에서 느낄 수 있는 적막함과는 다르다. 이것은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건물 밖 들판 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다. 인위적인 적막강산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동시에 침묵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요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을 것 같은 그 안엔 미시적인 소리들이 담겨 있다. 그토록 고요한 들판의 공기 속에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여 공존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종종 하이엔드 오디오의 그것에 빠져 있다가 나와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인공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인위적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바람 등 자연의 원초적 울림을 제거한 소리다. 때때로 그것은 현대 과학의 산물로서 정확한 소리의 구현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때로 즐겨 쓰는 적막, 검은 배경 같은 표현은 어찌 보면 인공적인 앰비언스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나는 조금 더 울림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라다가도 표백제로 하얗게 변해버린 표면에서 뭔가 남아 있는 독특한 텍스처를 발견하고 싶어 안달이 나곤 한다.


오디오에서 그것은 디지털이 아닌 태초의 아날로그, 반도체가 아닌 진공관으로 치환된다. 내가 항상 소스기기로 최신 디지털 기기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곤 하는 아날로그 시스템을 동시에 운용하는 이유다. 어떨 때는 아날로그 소스기기의 예산이 디지털의 그것을 덮어버릴 만큼 커지기도 한다. 더불어 트랜지스터 앰프를 사용하면서도 캐리 300B 같은 앰프를 항상 운용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은 자연으로 둘러싸인 비인공의 세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 속 미시적 소리의 질감이다.
하지만 최근 캐리 300B 앰프를 한동안 즐기지 않았다. 리뷰 테스트를 위해 사용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음악 감상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 오래 들어서 이젠 안 들어도 음질이 상상이 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조금 싫증이 잦은 나의 문제일까? 아무튼. 그러다 최근 구입한 1960-1970년대 포크 음악을 들어보려는 요량으로 시스템을 가동했다. 하지만 분리형 메인 앰프에서부터 캐리까지 내가 예전에 들었던 그 포크 음악의 앰비언스를 온전히 충족시켜주는 소리를 찾지 못했다. 어린 시절 가장 치열하게 듣고 감동해, 이젠 마음속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있는 음악과 그 음색. 그걸 찾지 못할 때의 안타까움과 그걸 되살리려는 간절함을 아는가?


레트로 디자인에 담긴 장인의 숨결
모두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갈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진 앰프가 아닌 이제 갓 나의 리스닝 룸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진공관 앰프에서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TDL 어쿠스틱스의 M88이 그 주인공이다. 수십 년간 진공관 앰프를 자작으로 만들어왔던 숨은 장인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것 외에 내가 아는 정보는 없었다. 아니 더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선입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디자인 콘셉트는 확고부동한 레트로(Retro)다. 최근 럭스만, 야마하, 티악 등 주로 일본에서 역병처럼 퍼지고 있는 복고풍 디자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 옛날의 추억이 가득 담긴 디자인 안엔 주홍빛 레벨 미터와 우드 박스가 빠질 수 없다. 우선 탄노이 인클로저 제작으로 유명한 김박중표 우드 박스가 꽤 묵직한 포름으로 앰프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디자인은 물론 마치 마란츠나 매킨토시의 아메리칸 황금기 시절 그것을 연상시킨다.
전면은 커다란 레벨 미터가 좌·우로 한 개씩 반듯하게 분리되어 늘어서 있고, 각 레벨 미터 아래로 좌측엔 입력 실렉터, 우측엔 볼륨이 위치하고 있다. 두 개의 노브 중앙에 달린 토글스위치에는 이 앰프가 가진 몇 가지 즐거움을 담아냈다. 가장 왼편엔 레벨 미터 램프의 밝기를 2단계로 조절할 수 있는 토글이, 중앙에 레벨 미터를 온·오프할 수 있는 기능을 담았다. 가장 오른편에 설치된 토글은 일상적인 음악 감상에서 꽤 요긴할 듯하다. 다름 아닌 라우드니스(Loudness) 온·오프 기능이다. 이미 하이엔드 메이커에선 음질의 순도를 위해 제거했던 기능. 그러나 실제 출력의 한계가 있는 진공관 앰프를 더 넓은 공간에서 박력 있게 듣기 위해선 순도보다 기능이 우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용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음질 위주, 저출력 A클래스 증폭
본격적인 증폭 부분으로 들어가면 이 앰프의 설계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대게 많은 대량 생산, 소비되는 진공관 앰프들이 KT88, KT90 등을 통해 출력 수치를 최대한 높이며 대신 트라이오드·펜토드 증폭 방식을 구분해 선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요즘 추세다. 그러나 TDL 어쿠스틱스의 M88은 철저히 음질 위주의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많은 현대 앰프들이 우렁차지만 드세고, 묵직하지만 건조한 음색을 갖는 이유는 대부분 증폭 방식에서 연유한다.
M88은 한 쪽 채널에 출력관 두 알씩 채용한 푸시풀 회로. 하지만 증폭 방식을 A클래스로 설계하고 대신 대출력을 양보했다. 8Ω 기준 출력은 채널당 단 25W. 내가 항상 주장하는 소출력 고음질 설계를 구현하고 있다. 더불어 앰프 상판을 따서 진공관을 총 세 종류 형번으로 바꾸어 적용할 수 있다. KT88, 6550, 그리고 EL34까지 앰프 한 대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형번을 바꾸면서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진공관 사이에 마련된 토글스위치를 움직이는 것뿐이다.
한편 초단과 정류관은 5814(12AU7) 두 알, 그리고 420A. 한 알에 맡겼다. 진공관의 열기가 대단하므로 상판 방열구 쪽에 공간을 넉넉히 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면으로 가면 채널 당 세 개의 스피커 출력단이 보인다. 8Ω과 4Ω 탭을 별도로 따서 스피커 공칭 임피던스에 각각 대응한 설계다. 입력단은 CD, MQS, 그리고 USB. 그렇다. 진공관 앰프지만 입력은 아날로그는 물론 MQS, 즉 그루버스 등에서 서비스 중인 ‘Master Quality Sound’, 그리고 음원 재생에 모두 각각 대응하고 있다. 특히 PC USB는 Xmos 사의 칩셋과 버 브라운 DAC 칩셋을 활용한 것으로 32비트/384kHz PCM 포맷에 대응하고 있다. M88에 더해 노트북 한 대와 스피커 하나만 추가하면 근사한 오디오 시스템이 완성되며 고음질 음원을 감상할 채비는 끝난다.


감미롭고 풍성하게 그러나 깊고 넓게
한없이 1970년대 추억으로 향하는 담백한 풍모, 두텁게 깎아지른 우드 케이스에 담긴 묵직한 몸체. 누구나 사운드에 있어서도 과거의 풍미로 꽉꽉 채워 넣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오해다. TDL 어쿠스틱스 M88을 마이텍 맨하탄 Ⅱ를 중심으로, 스피커는 디아파송 카리스 Ⅲ, 프로악 D Two, 심지어 토템 어쿠스틱 시그너처 원에 매칭해도 주눅 들지 않는 대역 균형과 음장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로날드 브라우티함과 쾰른 아카데미의 앙상블의 연주엔 풍부한 홀 톤과 원근감이 펼쳐지며 예상치 못했던 입체적 사운드 스테이징을 선보인다.
M88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는 당당하고 상쾌한 고역을 뽑아내며 아래로도 깊다. 고해상도 음원의 해상도도 해치지 않고 증폭해낸다. 예를 들어 조수미가 영화 <Youth>에서 부른 ‘Simple Song’에서 소프라노 고역이 쭉 뻗으며 목이 아닌 가슴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밸런스가 뛰어나며 심도가 깊어 무대 전·후 거리에 따른 원근감 표현이 돋보인다. 빈티지 디자인에 사운드도 다분히 회고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중역은 아마도 이 앰프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 중 하나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최근 그 어떤 시스템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농익은 중·고역을 들을 수 있었다. 적당한 해상력에 심한 착색을 일으키진 않는다. 그러면서도 촉촉하고 분진이 고와 손안에 말랑말랑하게 잡힐 듯한 물리적 촉감이 부드럽다. 예를 들어 린 스탠리의 ‘Fever’에서 치찰음이 거슬리지 않고 무척 유연하고 부드럽게 들린다. 피아노는 토템 같은 스피커에 매칭해도 ‘Cool & Clear’가 아니라 시종일관 따스한 중역이 넓은 반경에 걸쳐 폭신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총평
동일한 환경 조건에서 인간의 인지는 항상 더 큰 소리를 좋아하는 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그것을 더 뛰어난 소리로 인식하며 심지어 맹신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풀려지고 갈라졌으며 틈새가 벌어져 밀도와 입자가 부서진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허탈해진다. 전자가 대출력만 강조한 AB클래스 탱크 같은 앰프라면 후자는 싱글 엔디드 A클래스 앰프들이다. 넬슨 패스가 자신의 궁극적 이데아를 패스 랩스가 아닌 퍼스트 와트 브랜드로 삼은 이유도 동일한 이유에서다. TDL 어쿠스틱스의 M88은 날카롭게 벼린 비평의 칼을 들이대기 힘들 정도로 이성을 무력화시킨다. 나도 오디오 평론가 이전에 한 사람의 음악 애호가이기 때문이다. 레트로 진공관 앰프 M88, 음악에 취하기 좋은 앰프다.

 

문의 헤르만오디오 (010)4857-4371
가격 298만원   사용 진공관 6550(KT88)×4, 420A(5755)×1, 5814(12AU7)×2   실효 출력 25W(6550/KT88), 20W(EL34)   USB 입력 PCM 32비트/384kHz   주파수 특성 10Hz-42kHz(-3dB)   THD 1%(1kHz)   S/N비 91dB   입력 감도 290mV   입력 임피던스 100㏀   출력 임피던스 4Ω, 8Ω   크기(WHD) 40×19.7×38.5cm   무게 22kg

<Monthly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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