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L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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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LP-1
  • 김기인
  • 승인 2017.10.02 00:00
  • 2017년 10월호 (543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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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디스크의 회전은 33 1/3rpm이다. 1분에 33회전으로 도는 완만한 속도다. 정신없이 도는 금속성 CD와는 그 격이 다르다. 검은 염화바이닐의 음구에 빛이 비치면 마치 연슬(물여울)처럼 반짝인다. 그 자체로 일렁이며 도는 모습은 검은 바다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깊어진다. 그 속이 깊고도 깊어 심연의 검은색으로 나의 영혼에 다가온다. 물이 깊을수록 파도가 잔잔하다고 했던가.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깊은 그곳에 내 영혼까지 다다르는 음악의 파도 소리가 있다.
그 아늑하면서도 알 수 없는 깊이로 다가서는 낭만은 검은색 바이닐 속에 고대 암각화처럼 변함없이 부호로 새겨져 있다. 이미 수십 년을 동굴 속처럼 검은 재킷 속에서 잠자고 있던 바이닐도 꺼내서 툭툭 먼지만 털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으면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알 수 없는 조각의 언어에서 완벽한 음으로 살아나 여지없이 심금을 울리고야 만다.
놀랍디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 시대의 수록 기술을 넘어서 있는 완전체라는 것이고, 그 시대의 대 연주가의 숨결을 가장 완벽히 담은 절대 버전이라는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 녹음도 이 조각된 음구를 넘어 더 뛰어난 완전체로 나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시절의 대 연주가들은 갔지만 그 녹음은 LP 디스크에 묘비명처럼 남아 있다. 이 놀라움이 LP가 주는 그 첫 번째 낭만이다.


Capitol T-723


RCA LSP-1913

두 번째 낭만은 음악을 틀기도 전에 접하는 약 31.5×31.5cm의 사각 재킷에 영상으로 남아 있다. 아날로그 디스크 LP의 재킷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방형의 우주라 할 만큼 LP 디스크 재킷 속에는 수십, 수백만 가지 철학과 예술 표현이 LP 판에 수록되어 있는 음악을 반영하며 담겨 있다. 조그만 CD 재킷을 볼 때는 LP와는 달리 큰 감동이 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LP 재킷은 볼 때마다 감동이 넘쳐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묘하게도 재킷이 큰 것과 감동이 큰 것은 비례하는 것 같다.
우선 그 예술적 디자인과 색감이 각 음악 장르별, 국가별로 각양각색인데, 실로 다양한 표현력이 잠재되어 있다. 더욱이 재킷의 사진은 그 내용, 즉 음악적 경향을 예고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부드러운 재킷 디자인에는 부드러운 음악이, 파격적이고 강렬한 표현의 재킷에는 그에 상응하는 음악이 실려 있다.
클래식의 경우 초반 음반은 재킷만의 값이 있을 정도로 평가받고 있고, 희귀 음반일수록 재킷 가치가 있고 가격도 높다. 실제 클래식, 재즈, 국악, 가요를 막론하고 재킷만으로도 실거래되고 있어 그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


CORAL CRL-57042

HARMONY HL 7016

필자가 경험한 재킷 중에는 실로 기상천외한 것이 많은데, 그냥 재킷만으로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일 만큼 매력적이다. 일본 비너스 레코드의 경우 오로지 그 재킷 위 여성의 섹시한 그래픽 때문에 소장하는 분도 있는데, 사실 그 내용도 훌륭해 음질과 음악성 모두 탁월한 레코드다. 국내 레코드 중 시완레코드도 재킷과 더불어 레코딩, 음악성 모두 훌륭한 컬렉터스 아이템이며, 미국 RCA 리빙 스테레오의 경우도 리빙 스테레오 초반 마킹과 음질 양면을 추구하는 LP에 속한다. 프랑스 듀크릿 톰슨(Ducretet-Thomson)도 재킷, 내용 모두가 예술이고 희귀해 컬렉터들이 찾는 디스크다. 그 외에 내부 LP 판 자체에 연주자 사진을 프린팅시켜 판매한 픽처 디스크도 마니아층이 두텁다. 특히 재킷 사진이 섹시하다 못해 극도로 야한 앨범도 많은데, 내부 이너 슬리브를 여성 팬티 스타일의 시스루 천으로 만든 것, 또 외부에 바지 지퍼를 실제로 달아 발매한 롤링 스톤즈 <스티키 핑거스> 앨범은 초반의 경우 시스루 팬티 상태나 지퍼 상태가 그 디스크의 선택 포인트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
나이가 들어 세상만사가 시들해지고 낭만도 어디론가 멀리 여행 떠나 권태증이 그지없을 때 낭만이 가득한 LP를 한 장씩 꺼내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낭만이 돌아와 가슴 가득 충만해 있는 것을 느낀다. 특히 퇴색된 국내 가요 LP 재킷이나 SP 재킷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그 애환의 시절에 가 있는 자신을 느끼고는 하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낭만스럽다.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퇴색된 음악과 음질을 되새길 수 있다면 더 한층 행복하다.
LP 한 장이 가져다주는 낭만과 행복은 음악을 떠나 재킷만으로도 그 가치가 무한하다는 느낌이며, 그 안의 음악까지 더한다면 이 세상 인간이 만든 공산품 중 손에 꼽히는 낭만체가 아닌가 싶다. 이번 가을 LP 재킷의 낭만을 따라 몇 회의 여행을 떠나 보자.
 

DECCA(U.S.A.) DL 8649


 Westminster XWN 18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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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7년 10월호 - 5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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