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sui 200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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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sui 2000X
  • 김기인
  • 승인 2016.12.01 00:00
  • 2016년 12월호 (533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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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목표로 산을 오르다 보면 오르는 과정에서 보이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간과한 채 오로지 산만 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꼭 목표가 있어야 올바른 과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높은 곳으로 걷다 보면 그 과정에서 보이는 바위의 아름다움과 자작나무 단풍의 아름다움, 산들바람의 즐거움, 그리고 자잘하게 바위 밑으로 피어올라 있는 민들레의 작지만 우주적 노란색 환희를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산 중턱에 올라와 멀리 내려다보이는 사람들의 마을도 아스라해지고, 또 한 번 숨을 고르고 오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상에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목표로 가서 신을 보려는 사람은 신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과정에서 신을 느끼고, 가장 아름답고 멋진 인생의 오늘 하루,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신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하기 마련이다. 바람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신의 은총 아래 있는 것이다.
필자의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오디오에 관한 희망으로 매일을 꾸려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하기 싫고 다른 기호도 없고 돈도 없어서 오디오 자료를 뒤적이고, 세운상가에 나가서 진열되어 있는 오디오를 구경하고, 부품을 사서 앰프와 피커를 만드느라 납땜 향기(?) 속에서 고달픈 스트레칭을 하던 어린 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밤새워 오디오를 제작해 새벽녘에 달그락거리는 어머니 밥하는 소리에 숨을 죽이고 소리를 들어 보던 그때 그 환희는 아직도 대신 할 만한 재미가 없다.

어떻든 모든 용돈 투입, 거기다 살짝 거짓말까지 해서 참고서 살 돈도 투입, 세뱃돈도 투입, 생기는 돈이란 돈은 무조건 모두 오디오에 투한 결과 국산 WAVE 자작 앰프에서 서서히 벗어나 산스이 1000·1000A·2000X, 피셔 250TX·500C 진공관 등으로 발전해 나갔다.
군대를 마치고 직장을 들어가게 되면서 앰프류는 서서히 진공관으로 고정되고, 최종적으로 필자가 갖고 싶어 하던 최고봉 하이엔드 시스템까지는 무려 30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정상의 자리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해 이제는 간단한 보급기로 음악을 듣고 싶어 졌다. 다 덧없음을 깨달았고, 그 올라가는 과정의 즐거움과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상쾌함과 만족감은 人生 여정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디오로 깨달은 인생의 길이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이 웃을까!
나이가 들면 입맛도 예전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오디오도 십상 그 꼴이다. 최근 들어 그 어렸을 적 들었던 기기들이 왜 그리도 듣고 싶고 갖고 싶지 오디오 향수병이 필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중에서 고향 산나물처럼 떠오르는 오디오 맛이 산스이 2000X였다.
2000X는 필자가 제대하고 조금 후에 1000을 거쳐 마련한 상급기다. 당시 5000A로 스피커를 해 먹은 추억이 있어 산스이 A 시리즈는 정나미가 떨어진 터라 더 신형인 X 시리즈 중 저렴한 모델을 거의 신품 상태로 구했다. 물론 당시로는 고가 제품이었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 색소폰을 부는 이봉조 씨가 이 2000X와 AR-4X에 AR 턴테이블로 시스템을 꾸려 극찬하던 시절이라 소문만 듣고 2000X를 선뜻 구매해 당시 메인 스피커로 듣던 필립스 알니코 12인치 스피커에 연결하니 그야말로 삼빡한 고역과 온화한 중역, 박력 있는 저역 등에 초록색 녹턴 창까지 필자에게 부족함이 없었다. AR-4X와도 매칭이 좋지만 필립스 12인치 알니코 풀레인지와도 그 매칭은 환상적이었(물론 인클로저는 손수 만든 것이었지만). 네트워크 없이 풀레인지 유닛에 연결된 2000X의 음결은 막힘이 없고 시원시원해 마치 청량음료처럼 톡 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철 휴일이 되면 크게 틀어 놓고 마당에서 세숫대야에 우물물을 받아 세수하면 그 자리가 천국이었다.

그 2000X를 최근에 다시 구매했다. 오로지 추억 때문에, 그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서 올려보는 초록의 향수 녹턴창 때문에…. 그런데 놀라운 것은 70년대에 들었던 그 음색 거의 그대로로 완벽하게 동작하는 것이 아닌가. 잡음도 없고 초록 녹턴 창도 아스라한 그때 그대로로 살아 있다. 참 놀랍다.
하모닉 디스토션이 0.8%에 채널당 출력 40W, 8Ω 정도로 AR-2를 너무나 정갈하고 감칠맛 나게 울린다. 오히려 최근 판매되는 신제품 앰프보다 더 음악적이고 구수하다. 튜너의 수신 감도도 훌륭하고, 특히 포노부는 가히 발군이다. 가격은 필자가 사용하던 그 시절의 세 배 정도로 증가했지만 물가를 감안하면 오히려 엄청 내린 가격에 해당하리라. 캔 TR 출력석과 드라이브단, 견고하고 효과적인 히트싱크, 월넛 우드 케이스에 변함없이 부드러운 볼륨 작동감은 2000X가 얼마나 기계적 완성도와 내구성이 좋은지 증명해 주고 있다.
과정이 좋을 때, 그리고 그 과정으로 겪는 삶의 추억은 항상 생을 두 번 살게 한다. 오래 살아야 오래 사는 것인가! 과정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두 배 살면 인간의 장수는 저절로 보장되며, 그 장수의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현명한 판단과 신과의 접촉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최근 들어 가장 잘한 소비가 이 2000X를 집에 들여놓은 것이다. 그와 함께 수많은 깨달음과 아름다움, 행복한 神과의 대화 등이 한꺼번에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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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6년 12월호 - 5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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