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지배하는 자가 오디오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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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지배하는 자가 오디오를 지배한다
  • 월간오디오
  • 승인 200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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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보광동 최길순 씨

오디오의 시작
벌써 20년이 흘렀다. 내 오디오 추억은 군방송국에서 군복무를 시작하던 첫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 안방에는 월남에서 사온 덩치 큰 장전축이 있었다. 레코드판이 자동으로 작동하고, 끝나고 나면 또 하나의 판이 아래로 떨어져 몇 장의 판이 돌아가나 세어보던 기억이 난다. 또 지금의 외장형 하드디스크만한 크기에 작은 피아노 건반 같은 버튼이 있던 소니 카세트 데크의 기계 냄새, 그리고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 이름도 생생한 소니 워크맨의 중심 세대를 넘겼던 시절, 이런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한 채 나는 군에 입대했다.
지금 생각해도 떨리던 순간으로 제대를 앞둔 선임자에게 첫 인사할 때의 기억이다. 지금은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군 방송국의 모습은 대충 이랬다. 중앙에 미군들이 썼을 법한 오래된 콘솔이 있었고, 진공관 송출기에 양쪽에 테크닉스 턴테이블과 두 개의 티악 릴 데크, 그리고 유리창 안 스튜디오….
전형적인 라디오 방송국이었는데, 긴 벽면엔 LP 랙이 빼곡하니 판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제대를 앞둔 선임자가 골라오라는 판을 들고 처음으로 턴테이블에 판을 올리고 돌렸다. 이름모를 오래되고 낡은 스튜디오 모니터에서 마치 영화 <쇼생크의 탈출>의 한 장면이 생각날 정도로 풍성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배우는 무대에 남아~ 정적만이 남아 있죠’
대학가요제의 ‘연극이 끝나고 난 후’. 군대에 와서 이런 노래를 듣게 되다니. 그 후 나는 3년 내내 판을 돌렸고 릴에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쓰고 지우고, 송출기에 전파 띄우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하던 날 나는 아침방송까지 마친 후 3년 전 그 판을 가지고 새로운 무대로 향했다. 그 안에서 몇 번이나 릴데크를 분해·청소하고, 콘솔과 스피커 유닛에 납땜질을 했는지…. 그러나 이 경험은 내가 음향, 영상, 카메라 등 기계를 정말 좋아하게 된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벌면서 기계 욕심은 더욱 커져갔다. 어린 시절 그림 잘 그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친구처럼 되지 않아 난 사진 찍기에 몰입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음악도 좋아했지만 악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음악을 오디오로 표현하려 했다. 억지일까?
군 제대 후 난 운 좋게도 국내 최고의 클래식 공연기획사에서 2년간 근무했다. 이곳에서 나는 스테이지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경험했다(그 당시 내 방에는 매형에게 물려받은 켄우드 컴포넌트와 청계천에서 건져 올린 인켈의 명기라는 북셀프 스피커가 있었다). 무대는 국내 최고 연주자부터 해외 유명 아티스트까지 코앞에서 연주하는 절대공간이다. 그 때 어깨 너머로 훔쳐 듣던 스테이지 사운드는 지금 내가 추구하는 오디오 아트의 방향을 제시해준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끊임없는 시행착오, 그러나 즐겁다
지금보다 더 젊었던 날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좋은 소리를 찾아 헤맨 적이 있다. 이들과 함께 어느 집 소리가 좋다면 그곳으로 달려갔고, 음악카페에서 커피를 즐겼고, 매력적인 매킨토시의 파란 두 눈을 동경하며 ‘나도 언젠가는 꼭’ 하던 시기를 보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내 방에도 어느새 그 파란 불빛이 들어왔다. 그렇게 또 몇 년의 시간은 지나갔다.
자주 가던 곳은 황학동이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가 그 곳에 있었고, 집도 그리 멀지 않아, 그곳은 호기심 많은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졸업 후에도 한쪽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메고 이곳을 찾았는데, 낡고 볼품없는 것들을 필름에 담았다. 그러다 몇몇 중고 오디오 가게에서 귀동냥으로 소리를 들었고, 레코드 가게에서 먼지 쌓인 레코드판들을 넣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세운상가 오디오방에서 용산까지 발걸음이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기계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져 갔다.
소중한 내 애장기기 목록엔 지난 날 주워왔던 몇 개의 골동품이 있다. 심심하면 한 번씩 일체형 파나소닉 턴테이블의 판 떨어지는 맛과 떨거적거리며 돌아가는 스피커 소리를 느끼기 위해 이 골동품을 작동한다. 그리고 텔레풍켄 라디오도 빼놓을 수 없다. 희미한 진공관 불빛이 예쁜 라디오인데, 주파수를 맞추는 재미가 솔솔하다. 건빵 봉지에서 별사탕 건져 먹는 즐거움이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속에 병은 더욱 심각해져 쿼드, 매킨토시, 마크 레빈슨, 코플랜드, 마란츠, 뮤지컬 피델리티, AE, B&W, 프로악, 윌슨 오디오, 청계천표 자작품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을 보강했다. 그러나 소리가 주는 만족스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왜 숍에 가서 듣는 소리가 왜 좋은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구력이 쌓였다고 한다면 돌을 맞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겨우 어떤 것이 어떤 소리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요즘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 가입할 때 자기소개서를 쓰다보면 특기, 취미란이 나온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체크하는 것이 ‘음악 감상’인데, 우리들에겐 이 단어가 왠지 어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오디오 감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것이 시행착오인가? 전에 나는 오디오를 바꾸며 시행착오란 없다고 생각했다. 수업료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수업료로 소리의 취향이 정리되고, 또 한 장의 새로운 음반이 쌓이듯 하나하나 내 느낌에 다가오는 소리가 음악으로 들리고, 내 방 안의 사운드 포커스가 생겨나는 것 아닌가.
지금 내 시스템에서는 가을 같은 소리가 난다. 그러나 난 막연히 더 푸른 가을하늘 같은 소리를 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뭇잎 위에 이슬이 맺히는 소리를 원하고, 또 어떤 때는 소낙비 저편의 노을 같은 소리를 그리워한다. 정말 돌 맞아야 할 시행착오다. 내 주관적인 입장이 전체를 대변할 수 없지만, 음악을 느끼는 이가 나이기에 만족스러움의 표현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요즘 같이 정보가 풍부할 때 한 방에 소리를 잡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동안 경험을 쌓으며 선배님들도 정답 찾기는 정말 어려운 것임을 안 것만으로도 지금까지의 오디오 사랑은 소중한 경험임에 분명하다.

부메스터의 불꽃이 타오르고
 내 오디오 시스템에는 얼마 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적으로 내 이야기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그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내 방 안 마크 레빈슨 라인들의 변화다(마크 레빈슨이 지배하던 내 스피커 군단은 B&W 노틸러스 라인에서 와트퍼피 5.1로, 다시 지금의 시스템 7로 바뀌었다). 마크 레빈슨이 물러나고 부메스터가 앰프계를 점령한 것(마크 레빈슨 390SL만은 아직 그대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정말 남기고 싶었던 매킨토시 2275 인티앰프와 프로악 등의 서브시스템, 그리고 AV 시스템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눈이나 입보다 간사한 게 귀여서, 아니면 눈으로 보고 혀로 느끼는 맛보다 귀로 느껴지는 게 더 가슴 속 깊이 전달되어서 그런 것일까. 음반 한 장의 두터운 저역에 현혹되고 터질 듯한 퍼커션들의 손장난에 현혹되어 그전 마크 레빈슨의 아름다운 음악이 자꾸 아쉽게만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믿었던 혈통의 가문에서 잘못 태어난(?) 마크 레빈슨의 프리·파워가 최근 수리실을 들락거리며 해를 넘겼고, 그러면서 한때 최고임을 자랑하며 나를 사로잡았던 마크 레빈슨 라인의 붕괴(?)는 시작되었다. 나에게 이런 사실은 충격이었지만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모노블록으로 가야 하는 기로에서 부메스터라는 독일 병정 하나가 출연했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부메스터는 내 시청실의 오디션을 무사히 통과하고 말았다.
일명 ‘배틀 오브 더 파워 앰프’였던 그 오디션은 최상위 레퍼런스급 바로 아래 라인인데, 그러니까 메인 이벤트가 아닌 세미파이널 같은 경기라고나 할까. 주심은 시스템 7이고 선수는 마크 레빈슨 432와 부메스터 911 MK3이었다. 미국과 독일의 대결이다. 관객은 나와 몇몇 지인들, 무대는 우리집. 접전을 예상했다. 대결은 재즈, 클래식, 팝, 가요 등 390SL이 제시하는 주문대로 약 4,5일에 걸쳐 진행했다. 경기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우수한 내공의 911이 속병 앓고 있던 432를 가볍게 제압했다. 손잡고 왔던 011 프리앰프 역시 911의 기세를 등에 업고 마크 레빈슨 320을 어렵사리 물리쳤다. 부메스터 형제가 마크 레빈슨 형제를 몰아내고 만 것이다(관람료는 엄청났지만). 그렇게 오디션은 막을 내렸다.
폭풍처럼 배틀은 끝나고 떠나버린 마크 레빈슨의 자리에 앉은 911은 432처럼 양 옆 와트퍼피의 눈치를 보지 않고 더 이상 힘겨워 하지도 않는다. 011은 마크 레빈슨처럼 세련되지 않은 듯하지만 모든 장르를 안정적으로 소화했다. 911에게 귀엣말로 정겹게 속삭이고, 졸지에 서자가 되어버린 390만 마크의 자존심을 꿋꿋이 세웠다.
정적도 잠시 그 옆에서 지켜만 보던 LP12 형님이 이제야 그간의 관록을 앞세워 슬슬 참견하고 나섰지만 그 나이가 힘에 겨웠던 것인지 390과의 또 다른 배틀은 피하는 듯했다. 이제는 각기 잘나고 개성 있는 주연들만 남아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피가 튄다. 이제 나머지는 연출자의 몫인데…. 항상 느끼는 연출자의 한계를 여기서도 실감한다.

아직 내 엄지손가락은 무겁기만 하고
내 무대 철학은 관객들의 박수가 아니고, 공연 후 주먹 쥔 손에서 기꺼이 뽑아지는 엄지손가락이다. 내가 관객이 된 내 방안 무대, 그리고 소리에 내 엄지손가락을 기꺼이 뽑을 수 있을까?
직업이 프로듀서여서 무대라는 공간과 객석 사이에 언제나 함께하는 PA 시스템이 귀에 익었지만 공연 때마다 만나는 음향감독들과의 교감이야말로 멋진 소리를 찾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부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스테이지 사운드에서 궁극의 소리는 마이크를 거치지 않은 원래 소리다. 홀이 크다고 악을 쓸 수 없어 기계의 도움을 받는 간단한 이치지만 그러기에 우리시대의 소리전달이 너무도 거대해지고 첨단화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더 많은 기계를 통해 전달되는 오디오 사운드도 마찬가지지만 모두 분명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가수와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는데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으로 가기 전 나는 팩스로 항상 쓰는 30채널 이상의 콘솔과 마이크 등 사운드 스펙을 주문했다. 그것은 20여 명의 세션과 코러스로 구성된 공연이니 당연한 주문이었는데, 뉴욕 공항에 내리자마자 달려간 카네기홀에선 16채널의 콘솔밖에 없다하니 그 뚱뚱한 홀매니저 아줌마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많은 채널과 마이크가 필요한지 이해 못 하던 그 홀매니저는 잠깐의 실랑이 끝에 우리를 극장으로 안내했다. 극장에 들어선 나는 나도 모르게 힘껏 박수를 쳤고 그 단 한 번의 박수로 오케이 사인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짝’ 하는 박수 소리가 객석 맨 뒤까지 전달되는 신비한 경험, ‘아! 여기가 이래서 세계 3대 극장이구나’. 그 극장에서 공연하며 느꼈던 소리 냄새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있는 듯하다. 그때 만약 더 화를 냈다면 미안해서 큰일 날 뻔한 그 경험, 그것은 이제야 느낄 수 있는 공간음향의 중요함일 것이다.
라인업을 확정한 지금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 중 첫째가 바로 그 공간음향이고, 둘째는 아날로그의 조화이다. 내 리스닝룸 오른쪽엔 유리창, 그 반대편은 뚫려 있는데 꽤 길어서 포커스를 잡기가 어렵다, 그전에 와트퍼피 박사님께 전화해서 자문도 구해보고, 숍 매니저와 여러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액팅 에리어와 블러킹을 잡았지만, 이젠 옆 공간에 펜스를 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집모양이 망가지는데…. 숙제는 끝이 없다.
얼마 전 먼지가 많아 카펫을 치웠더니 그새 소리의 모양새가 달라져 다시 원위치해 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보기도 했다. ‘소리궁합이 이렇게 어려울까. 이젠 그만 스톱’ 이 상태로 큰 변화 없이 정리되길 바란다. 시쳇말로 복권에 당첨되지 않고서야 집이 커지기는 어려우니 제대로 된 리스닝룸은 당분간 잊고 현재의 저마다 잘난 시스템의 소리 달램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또 하나의 숙제는 아날로그의 접합이다. 오디오를 제외하고는 상당한 ‘얼리 어댑터’임을 자처하는 나지만 아날로그의 느낌은 어떠한 신기종 체험보다 재미와 기대감이 대단하다. MM에서 MC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지만 현대 스피커에서 걸려지는 아날로그의 음악은 왠지 깊이가 덜한 것 같고, 가끔 숍에서 귀동냥하는 진공관에 걸려진 빈티지 형님들의 스피커 안쪽 저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가 우러러 보인다.
현재의 린과 암에서 가늘게 느껴지는 전기 노이즈도 문제다. 아날로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청계천 덕재 형님께 자문도 구하고 인터넷 정보에 의존도 해보지만 그냥 깊이 없이 겉멋에 젖은 내가 쉬운 답을 찾아내기란 정말 어렵다.

그냥 막연하게 마음에 두고 있는 게 가라드 301이다. 최근 나는 이 숙제를 풀기 위해 이베이(e-bay)도 뒤져 보고, 숍에서 귀동냥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음 같아선 베이스와 암 등을 별도로 구입한 뒤 직접 베이스에 앉혀 보고 싶은데, 시간과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과제는 한도 끝도 없는 듯하지만 어디까지나 키는 분명 내가 쥐고 있으니 내가 좋으면 그것이 최고인 ‘오디오 라이프’를 생각하며 이제 자리 잡고 있는 시스템에 몇 장의 음반을 걸어본다.
항상 좋아하는 미스사이공의 ‘The last night of the world’. 무대의 감정과 솔로 색소폰의 맛이 역시 짜릿하다. 우리나라 블루스의 대명사 김목경의 ‘멕시코로 가는 길’에서 멋들어진 일렉트릭 기타 냄새를 느껴본다. 그냥 객석에서 맛보는 느낌, 거기까지만 바란다.
최근 우리 노래 중 녹음 잘된 나무자전거의 ‘우리집 못 찾겠네’. 예술적인 강인봉의 어쿠스틱 기타 소리와 차분한 노래의 중심, 지난 번 무대에서의 그것과 거의 같다. 타고난 보컬 김형섭의 하이 보이스도 같은 기운으로 전달된다.
‘참! 좋!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전 마크 레빈슨이 이 소리보다 더 좋지 않았나? 이제 자리 잡은 듯한 소리가 다시 내게?’라는 여운을 던지고, 또 다시 혼란스러운 오디오 사운드는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내게 막연한 숙제를 남긴다.
난 언제 내 엄지를 기꺼이 빼낼 수 있을까? 언젠가는 다시 마크 레빈슨 라인으로 돌아갈 것이고, 또 언젠가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오디오 라인이 내 방안을 지배할 것이다. 나와 같이 공연하던 연주자의 땀이 보이는 소리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끝없는 숙제다.

▶▶최길순 씨의 시스템
스피커 윌슨 오디오 System 7   프리앰프 부메스터 011, 사운드 디자인 YP 507
파워 앰프 부메스터 911 MK3   CD 플레이어 마크 레빈슨 390SL  
LD 플레이어 파이오니어 CLD-S206   레코더 타스캄 CD-RW4U, 마란츠 DC1020
턴테이블 린 손덱 LP12   튜너 데논 TU-490RG
라디오 텔레풍켄 Wechselstrom-Super, 노르망디 라디오, 금성 라디오  뮤직센터 파나소닉 SS6000
전원장치 파워텍 PAV-5000   케이블 트랜스페어런츠 Muse Wave Ul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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