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가객, 백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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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가객, 백창우
  • 이창근
  • 승인 2014.06.01 00:00
  • 2014년 6월호 (503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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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크란 장르를 요즘 각광 받고 있는 옥상달빛, 십센치 등을 비롯한 홍대 주변 젊은 뮤지션들의 전유물로 생각한다면 오늘 주인공은 이번 기획에 전혀 어울리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포크 부활을 꿈꾸는 열정의 소유자란 관점에서, 그리고 포크 원류를 되짚어 본다는 의미에서 그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김광석에 대한 그리움을 최 측근이자 작곡자를 통해서라도 해소해 보고자 하는 욕심 또한 한몫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백창우란 사람이다.
그는 이미 20대 약관에 강영숙의 ‘사랑’을 시작으로 임희숙의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된 김광석의 ‘부치지 못한 편지’, 윤설하의 ‘벙어리 바이올린’ 등 꽤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작곡가 정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서슬 퍼런 검열의 시대를 견뎌낸 포크가수이자 80년대의 김민기로 불렸다는 사실은 모르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
노래 동아리 <노래 마을>의 리더로서 80년대 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더불어 민중가요 저변 확대를 일군 장본인이었고,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 <가객>, <동요 북&송> 등 20여 장 가량의 음반을 기획·연출한 음반기획자인 동시에 4권의 정규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대중가요 외에 9장의 작곡집, 그리고 동요, 창작 민요, 민중가요, 환경 음악, 복음성가 등 그가 쏟아낸 노래만 2천곡이 넘고, 현재는 어린이 음반 제작자로서 어린이 음반사 <삽살개>, 어린이 노래 모임 <굴렁쇠 어린이>를 이끌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방면에서 쉼 없는 활동을 참으로 게걸스러울 정도로 실천 중인 양반이다.
여러 직함을 떠나 백창우란 한 사람의 일상을 보기 위해 4월말 억수같이 퍼부어 대는 봄비를 뚫고 강남의 모 녹음실 앞에서 그를 만나보았다. 모습은 비록 초로에 접어든 아저씨였으나, 그의 눈빛은 강렬했고, 음악에 대한 욕구와 포부는 1980년 그의 데뷔 때와 비교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가 있었다. 그의 간단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Q. 안녕하세요. 우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요.
A. 오늘도 <굴렁쇠> 아이들 녹음 중이었어요. 특별히 엄마, 아빠랑 같이 참여하는 녹음인데, 학부모님 한 분이 늦게 오시게 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Q. 백 선생님 하면 임희숙 씨의 ‘나 하나의 사랑은 가고’란 곡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만들게 되셨나요. 가수를 먼저 정해놓고 가수를 겨냥해서 만든 곡인가요?
A. 아닙니다 우연히 기차 여행 중에 만들게 되었는데, 임희숙 씨가 여러 어려움을 겪은 후라 그렇게 그분에게 가게 되었어요. 재기를 완전 도운 곡이라 보람이 있었지요. 지금도 고맙다고 자주 얘기하세요. 그런데 벌써 참 옛날일이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웃음).

Q. 백창우를 논할 때 80년대의 김민기로 평가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맨 처음 음악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는지요?
A. 네. 그런 말을 좀 듣긴 했지요. 저희 때만 해도 사전 검열이란 게 있었어요. 일단 붉은 태양이 떠올라도 안 되고, 무덤이란 단어조차 용납이 안 될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처음 음반 만들 때 12곡 중 11곡이 잘려나갔습니다. 나머지 남은 한 곡이란게 ‘금자동아 은자동아’란 건전 노래였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귀빼고 ×뺀 당나귀’라고 한탄하고 그랬지요. 다분히 저항적인 색채가 있어 언론에서 그리 불러주기도 했는데, 제2의 김민기는 무슨, 아니에요(웃음). 음악은 힘들게 방황했던 청소년기를 거쳐 자연스레 친해졌습니다. 79년 10.26 사태 이후에 선배 소개로 지명길 씨를 만나게 되었고, 한 번 해 보자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재미있겠다. 싶은 마음에 이촌동 서울 스튜디오에서 이틀 간 녹음으로 데뷔 음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거예요.

Q. 선생님 하면 또 한 사람 고 김광석 씨를 얘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가수 김광석 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궁금합니다.
A. 참 착하고 여린 친구였어요. 그래서 자기에게 부여된 여러 가지를 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아요. 사실 그날 그 일 있기 직전까지 같이 술 마시고 그랬거든요. 귀가 때까지 함께했던 사람이 저일 겁니다. 90년대 초에 광석이에게 그랬어요.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시 노래를 만들 건데, 네가 이제 좀 유명하니까 선봉에 서달라고요. 그래서 본인이 흔쾌히 수락했고 유작 노래인 ‘부치지 않은 편지’가 그렇게 나오게 되었죠.

Q. 김광석씨가 지금까지 계셨다면 선생님께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안겨주지 않았겠습니까?
A. 에이 그거야 뭐(웃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가 없다는 거지요.

Q. 어린이 음악은 어떻게 하시게 되셨습니까?
A. 80년대 초반, 성남의 달동네에 개척 교회를 연 곱사등 장애를 가지신 전도사 님이 여름 성경 학교 일을 도와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팀을 만들어 전래동요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문화 혜택도 못 받고 가난한 집 애들이라 학원도 못가고 하니까 시간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이 아이들과 같이 놀아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탄생한 게 어린이 노래 모임 <굴렁쇠>와 동아리 <두레>가 되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게 있을까요?
A. <노래나무>, <포크플러스> 같은 레이블을 통해 많은 가수들이 음반을 내고 공연 중심의 활동을 하면서 먼저 성공한 선배가 덜 알려진 후배를 같은 무대에 세워서 밀어주고 끌어주는 품앗이 문화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예전엔 일반화되었는데,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거든요.

Q. 마지막 질문인데요 어떤 뮤지션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A. 하하. 뭐라 할 말은 없고요. 그냥 내 빛깔을 가지고 잘 놀다간 인간이랄까.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뮤지션이랄 것도 없고요. 뭐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인걸요.

4시간에 걸쳐 메밀국수집과 커피전문점, 녹음실 등으로 장소는 바뀌었지만 창밖의 빗줄기처럼 대화는 한결같이 진지했고, 음악 얘기만 나오면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본인만의 철학을 가감 없이 역설하는 모습에서 거장의 풍모는 숨길 수가 없었다. 지면 관계상 모든 대화를 옮길 수 없음은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의 머리엔 어느덧 서릿발이 그득하고 현실의 벽 앞에서 번뇌하는 50대 후반의 모습을 숨길 수는 없지만, 아직도 해맑은 그의 감성과 예술적 열정은 포크 부활의 시간을 앞당기리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의 글로서 영원한 청년 가객 백창우를 기억해 보고자 한다. 

※ 장시간 최선을 다해 대화에 응해 주신 백창우 선생님과 만남을 주선해 주신 가수 위대권 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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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4년 6월호 -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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