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의 인디 포크 가수들 Par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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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의 인디 포크 가수들 Part.1
  • 이창근
  • 승인 2014.05.01 00:00
  • 2014년 5월호 (502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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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 주술사, 인디언수니

현재 우리나라 대중 음악은 기획형 아이돌 그룹군과 트로트 성인가요로 크게 양분된다. 한때나마 다양한 영역에서 참신한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주 소비층의 이탈과 음반시장의 악화로 여타 장르들은 비주류로 내몰린 지 오래다. 그중 포크 음악도 예외일순 없었고, 소박한 통기타는 R&B와 감각적인 댄스리듬에 묻혀지며, 느리고, 고루한 삼촌 음악이자 40대 이상 세대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국 포크 음악의 시작은 한대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석별의 정이나 그리운 고향 등을 번안 소개했던 건전 노래의 전도사 전석환 등을 포함 언급할 만한 인물들은 꽤 많았다. 그러나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리고 독창성을 담은 한국적 포크의 시도란 관점에서 그 최초는 68년 한대수의 데뷔부터로 보는 것이 옳다. 이후 양병집, 김민기 등의 저항적 1세대가 출범하면서 지금껏 애창되는 여러 명곡들이 쏟아졌으나 군사정권의 박해와 무조건적인 검열로 인해 정작 당시 대중들과의 소통은 차단되어 버린다. 그 결과 서정성과 사랑이라는 레퍼토리를 담은 소위 낭만적 포크로 돌파구를 찾게 되었고, 한국 포크 음악의 산파 역할을 해낸 쎄시봉과 쉘부르 출신 스타 군단이 전면에 포진하게 된다.
트윈폴리오, 양희은, 김세환, 박인희, 어니언스, 김정호 등이 그들로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라는 청년 문화의 기수이자 포크 황금기를 연 장본인들이다. 하지만 반짝했던 영화도 잠시 70년대말 대마초 파동과 80년대까지 이어진 군사정권의 연장선 하에서 또 한 번 표류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여파로 매스컴을 배제한 공연 중심의 활동, 즉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시작되면서 조동진, 이정선, 정태춘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아마도 지금의 중년 세대가 생각하는 포크의 향취는 이 시기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80년대 이후 포크는 당시 민주화의 과정이란 시대상과 맞물려 민중가요와 결합되면서 좀더 강렬한 저항과 투쟁적 의미를 담게 되었고, 안치환, 노찾사, 그리고 ‘벗이여 해방이 온다’로 전설이 된 윤선애 등을 통해 집회현장에서 불리는 일이 많았다. 이와 더불어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랄 수 있는 시노래 작업 또한 활발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90년대 서태지의 등장 이후 10대들이 음악의 주 소비층으로 대두되면서 포크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포크의 성골 혈통으로 분류되는 김광석이란 슈퍼스타가 존재했음에도 그의 죽음 이후 이렇다 할 후계자를 만들지 못했고, 왕년의 스타들은 하나 둘 미사리 한구석으로 집결하기에 이른다.
오늘날엔 수년 전부터 인기몰이중인 오디션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도약의 발판이 생긴 듯도 싶었지만 특정 젊은 가수들에게만 돌아가는 이벤트성인 점은 못내 아쉽다. 특히 홍대 주변 인디씬들이나 지방 무대를 거점으로 하는 중진 가수들에겐 너무도 척박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들의 관심이나 이해에서 너무 벗어난 점 또한 한몫하고 있다. 일례로 음악을 좀 들었다는 사람도 어렴풋이 김두수는 알지만 김의철은 거의 모른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몇 편이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인디포크계의 숨은 실력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음악 속에 정작 오디오쟁이를 솔깃하게 만들 만한 곡이 없을까 란 호기심 또한 부수적 이유이기도 하다. 다분히 주관적인 소개가 되겠으나 그 어떤 친분이나 이권은 개입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인디언 아닌 인디언수니
이번 기획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인디언수니를 삼으려 함은 그나마 낯설지 않은 인디포크계의 대표주자란 점이 우선되었다. 목포에서 나고 광주에서 자란 그녀는 분명 인디언은 아닐 게다. 그러나 극히 자유롭게 사는 자연인이란 개념에서 논한다면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모습 속에서 인디언임에 틀림없음 또한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인디언수니란 이름의 배경엔 미국에서 그녀가 공부한 전통음악이 가장 큰 토양이 되었을 것 같다.
2006년 발매된 1집 <내 가슴에 달이 있다>는 동명 타이틀곡과 ‘나무의 꿈’ 등이 회자되면서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던 그녀의 데뷔 앨범이다. 음악적 파트너인 임의진의 시와 번안 가사, 그리고 자작곡들이 어우러져 시종일관 편안하면서도 깔끔한 가수 특유의 파스텔 톤을 잘 살렸던 인디언수니의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보이스 대역에 국한된 녹음이 그녀만의 여운감을 많이 탈락시켜 오디오쟁이적 시각에선 녹음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앨범이기도 하다. 그리고 포크 & 시음악이라는 창틀 속에 갇힌 다소 소극적인 자세 또한 감지되지만 데뷔 앨범임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진다.
2집 <비오는 날 해바라기>에선 비로소 본인 음악을 덧입히며 좀더 자기 색깔을 담고자 했음을 알게 된다. 자연과의 동화를 주제로 전작에서 보였던 수줍음 대신 강인한 터치로 묘사됨은 완전체에 한 발짝 가까워진 모습이다. 회화로 비유하자면 농담이 더해진 정물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진하면서도 탁하지 않게 표현됨은 역시나 가수의 역량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수의 힘은 3집 <Nostalgia>에 잘 용해되어 있다. 각국의 귀에 익은 민요를 영어 버전으로 녹음한다는 자체가 사실 모험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인디언수니이기에 가능했으리라 사료된다. 과거의 주크박스마냥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그녀의 발성은 안정된 녹음 탓에 상당한 퀄러티를 경험케 해준다. 가장 그녀다운 보이스컬러를 맛볼 수 있는 앨범으로 가수에 대한 소속사의 신뢰 없이는 불가능했을 참신한 기획이 돋보인다.
그녀를 가수로서 몇 가지 정의해본다면 우선 음악에 대한 절제와 진지함을 들 수 있다. 노래하는 이는 자신의 돋움 없는 절제가 가능할 때 몰입을 강요하지 않는 편안함을 줄 수가 있고 어떤 노래라도 최선을 경주하는 진지한 접근만이 관객에게 신뢰를 얻을 수가 있다. 눈을 감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관객을 사로 잡을 수 있는 가장 큰 포인트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착 감기는 점착성으로 매료시켜버리는 인디언수니표 마력 같은 것을 언급하고 싶다. 이러한 마력은 때론 샤머니즘적 주술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노래는 영혼을 홀린다기보다는 안정과 공감이 우선하므로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늘 그의 음악에서 긍정과 수긍이란 두 단어가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언제나 동그란 마크가 붙은 작은 일제 기타에 깃털 장식을 달고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그만의 방식과 요란하지 않은 퍼포먼스로 무대를 마무리한 뒤 홀연히 기타 가방 하나 메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떠나곤 한다. 어쩌면 21세기형 보헤미안이나 히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없는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늘 자기만의 사회 참여를 고집하는 반전이 있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소신과 용기가 그녀의 작은 몸집 속엔 들어 있다.
강정마을 문제로 제주도 구럼비바위에 올라 비 맞으며 노래하거나 때론 이름 모를 노동자의 노제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서늘하게 부르는 이 또한 인디언수니가 분명하다. 그녀를 흔히 에코페미니즘 뮤지션이라 단정짓기도 하지만 오직 노래로 저항하며 편견 없는 싸움을 마다않는 모습에서 절대 일정한 틀 속에 가둘 수만은 없는 사람임을 확신케 된다.

내가 바라본 인디언수니
그녀와는 짧았지만 강렬한 한 번의 만남이 있었다. 친구의 자택에서 열린 공연 뒤풀이 중 민낯에 가까운 자그마한 여인을 한 명 보았는데, 그녀가 바로 인디언수니였다. 난 이미 소주 세 병 가량을 마신 뒤라 혈중 알코올 농도는 주사를 부리기에 충분한 수치였고,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그저 초대를 회피하고만 싶었다. 게다가 모임 참석자들조차 친구 부부 외엔 모두 초면이라 불편함은 컸었고, 늦게 도착한 취객을 보는 시선 또한 그리 고울 리 만무했다. 그러나 여러 실례 속에서도 어색해하는 나를 먼저 배려하며 질문과 신청곡에 친절과 성의를 다해 답해주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한옥 처마 밑에서 울리던 ‘내 가슴에 달이 있다’는 기타 하나만으로 채워진, 라이브의 진수였고 허리 굽혀 인사하며 문밖까지 배웅해주던 반듯한 인성은 취중 자양강장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작년 여름날 잠시나마 함께 했던 그녀는 천상 가수이자 일별(一別)의 기억까지 챙겨주던 따뜻한 친구로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친구를 부를 때 인디언수니라 칭한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는 자꾸만 감동이란 낙인(烙印)을 감당하라 한다. 그 감동의 희비(喜悲)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일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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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4년 5월호 - 5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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