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기적, 그리고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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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기적, 그리고 해후
  • 최윤욱
  • 승인 2013.11.01 00:00
  • 2013년 11월호 (496호)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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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에 우연히 필하모니 주인이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하모니라는 오래된 기억의 한 조각이 생각났다. 잠시의 생각 끝에 K씨가 떠올랐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예술의 전당 건너편 악기상들이 즐비한 대로 1층에 필하모니라는 오디오 가게를 낸 호기로운 사람이 K씨다. 현재 서초동 국제전자센터에 있는 필하모니와는 상호만 같을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뱃심 좋게 예술의 전당 맞은편에 아날로그 오디오 숍을 내는 것까진 좋았는데, 노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당구에 깊게 빠져서 큐를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당구치고 놀러 다니다 보니 숍은 나날이 경영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 친구가 금전적으로 깔끔하지 못해서 신용까지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나중에 문제가 터진 후에 알게 된 사실이다. 당시 가게에 자주 가던 나는 숍에 있는 오디오 기기에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가게에 들렀는데, K씨가 자랑삼아 카트리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일본 잡지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기적(奇跡)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키세키 카트리지였다.



아날로그를 오래했다고 하는 마니아라도 실물은 고사하고 키세키라는 카트리지가 있다는 것조차 모른 사람이 많다. 워낙 적은 물량을 수작업으로 생산을 해서 아는 사람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 카트리지 삼총사는 고에츠와 미야비, 그리고 키세키다. 고에츠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미야비와 키세키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고에츠가 특유의 매혹적인 매력이 있다면 미야비는 상대적으로 우아함이 깃든 소리다. 키세키는 미야비보다 따뜻함이 덜한 대신 점잖고 차분하면서 고고함이 깃들어 있다.



K씨가 선뜻 며칠 들어보라고 권해서 들고 왔다. 당시에도 고에츠가 메인 카트리지였는데, 고에츠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가 되는 소리였다. 고에츠가 타오르는 촛불 같은 안온한 화사함이 있다면, 키세키는 좀더 섬세하고 디테일하면서 화사한 화장기가 없다. 고에츠가 여성스러운 화려함이 있다고 한다면 키세키는 정숙하고 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며칠 듣고는 몸이 달아서 반납할 때 사기로 마음먹었다. 카트리지를 반납하러 필하모니에 들러서 가격을 물으니 대답을 안 하는 것이다. 이미 팔기로 한 것인지 물으니 그렇지는 않단다. 두 세번 가격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팔지 않을 심산인 듯했다. 말로는 자기가 쓸 것이라고 했다. 아쉬운 마음은 있었지만, 더 이상 얘기 안하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물론 허전한 마음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 뒤로 아주 드물게 키세키를 이베이 등에서 두 번 정도 보기는 했지만 선뜻 구매하게 되지는 않았다. 몸이 달았던 들뜬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어갔다. 그렇게 키세키 카트리지는 기억의 한구석으로 자리잡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필하모니가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망하고 와이프와도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그 때 필하모니와 거래했던 업체나 애호가 중 상당수가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 때 손해를 보았던 사람 중에 K씨에게 채권을 받기 위해 최근에 법적인 절차를 밟으면서 K씨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된 것 같다.



K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옛 생각에 잠시 젖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조금은 낯선 느낌도 들었다. 그 즈음 잘 아는 지인이 만나자는 전화를 해왔다. 아날로그에 대해서 여러 정보를 주고받는 지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고 나갔다. 지인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카트리지 박스 하나를 내민다. 받아서 열어보니 푸른 빛을 발하는 키세키 카트리지가 차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하는 감탄사와 함께 '키세키 카트리지네요'라고 하니 '역시 아시는 군요' 라고 답을 한다. 아는 사람에게 가야할 것 같아서 들고 왔단다. 그러면서 선뜻 선물이라고 건네주는 것이다.
선물로는 너무 과하다고 사양했지만 이미 내 눈은 키세키 카트리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간절히 원할 때는 가질 수 없었는데, 마음 비우고 지내나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들어보니 과연 예전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주는 그 소리로 나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최근 키세키가 다시 생산되면서 전보다 구하기가 한결 쉬워졌는데, 내가 받은 것은 구형 블루라는 모델이다. K씨라는 사람과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키세키 카트리지와 얽힌 일인데, 10여년 만에 불쑥 그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혀 예상치 않게 키세키 카트리지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키세키와의 인연이 아닌가 싶다. 뜻하지 않은 키세키와의 해후가 이렇게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인생사 인연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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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3년 11월호 - 4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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