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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골드베르크
최상균의 음질 좋은 에세이 2
글 최상균 2013-09-01 |   지면 발행 ( 2013년 9월호 - 전체 보기 )

나는 겨울이 좋다. 속을 감추는 우리의 본성을 닮은 '밀폐형' 옷차림을 보는 것이 좋고, 한가하게 서성이는 사람이 드문 간결한 거리의 풍경이 좋다. 소복이 쌓인 눈에 남긴 첫발자국에 가슴 설레고, 쌀쌀한 거리를 비춰 주는 외딴 가로등의 빛줄기에서 위안을 얻는다. 짙은 밤하늘을 견뎌 내는 가녀린 초승달은 바라보는 것만도 사랑스럽다.그런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겨울은 어려운 시기를 상징하거나 생명력의 고갈, 전성기가 지난 쇠퇴 등 쓸쓸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겨울이 좋다. 겨울은 인간이 원래부터 외롭고 고독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이 되면 사람의 체온이 더 그립고, 따듯하게 덥힌 정종 한 잔의 온기에 훈훈해 하며, 따듯하게 달궈진 진공관 앰프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원래 여름을 싫어하지만 올해는 정말 지독하다. 아열대 기후가 이번에 우리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고 첨부터 작정한 것 같다. 이렇게 지루하게 긴 장마를 겪은 것도, 커다란 재앙의 전조가 되는 것처럼, 한밤중보다 훨씬 깜깜한 대낮에 태연하게 갈치조림 정식을 먹어 본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 때문에 주위가 신경 쓰여서 얼큰한 국밥을 시키지 못하고 별로 먹고 싶지 않았던 콩국수를 먹어야 했던 적도 몇 번이나 된다. 내가 기억하기로 최악의 여름은 1994년이었는데, 그 때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혹독한 여름을 겪고 있다.내가 사는 곳은 오피스텔이라 한쪽에만 창이 나 있는 구조이므로 여름에는 특히 더 덥다. 끈끈하기까지 하니 에어컨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둘 수는 없는 일이다. 냉기를 오래 쏘이면 머리도 아프고, 전기세도 신경 쓰이므로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잠깐 동안 켜고 끄기를 반복한다. 밤에도 상황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아서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해도 금세 몸이 달아오른다. 잠들기도 어렵지만 잠이 들더라도 금세 깨버리게 되고, 결국 밤에도 에어컨 켜고 끄기를 반복하면서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 다음날 하루 종일 머리가 띵하고 몸이 찌뿌듯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낮에는 다시 에어컨을 켜고 끄며 냉기와 열기를 교대로 받아들이는 악순환의 연속이다.그래도 낮과 비교하면 밤이 훨씬 낫다. 어쨌든 온도가 낮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는 여름이 가진,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특성들 - 소란함이라거나 노골적인 활기, 또는 지극히 감정적인 충동 같은 것들이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낮에는 음악을 듣는 것이 짜증날 때도 있지만, 깊은 밤에는 작은 소리로 음악을 들으면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시린 겨울을 상상해 보는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밤중에도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있는, 그 점에서만은 정말 최고의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습관 때문인지 별로 크게 듣지 못한다. 옆집들과 아랫집은 사무실이라서 저녁에는 모두 퇴근하지만 한밤중에 볼륨을 올리면 괜히 혼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밤중에는 작은 음량으로 속삭이듯 음악을 틀어 놓는다. 한밤중에는 주위가 워낙 조용하니 작게 들어도 또렷하게 들린다. 목소리만 큰 사람의 이야기보다 목소리가 나지막하더라도 또렷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을 만한 내용이 많은 것은 늘 느끼는 바이고, 그럴수록 더 집중해서 듣게 되는데, 작은 음량으로 달콤한 음악을 집중해서 듣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다만 음량을 작게 하면 음색의 밸런스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 오디오 기기에도 문제가 있지만 정작 우리의 귀가 더 문제다. 우리의 귀는 선형이 아니어서 소리에 비례하여 반응하지 않는다. 우리의 귀는 작은 소리로 들을 경우 중역대만을 듣게 되며, 특히 고역보다도 저역 쪽을 감지하지 못한다. 간혹 기능이 많은 앰프에서 라우드니스 스위치를 볼 수 있는데, 이 스위치를 켜면 감쇄된 고역과 저역을 평탄하게 보정해 준다. 하지만 오디오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필요 없는 회로를 한 번 더 거친다는 점이 영 내키지 않고, 음도 부자연스럽게 고역과 저역을 강조하는 느낌인 경우가 많아서 선호하지 않는다. 결국 한밤중에는 깊고 낮은 저역이 담긴 음반보다는 소편성의 곡을 들으며 음질과 타협을 해야 한다.한밤중에는 주위가 워낙 조용하므로 대낮에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던 미세한 잡음이 들리는 경우도 있다. 느린 음악에서 음 사이에 정적이 많을 때 이런 잡음이 거슬리는 경우가 많은데, 책상에 놓인 스피커와 같이 거리가 가까운 경우가 문제다. 한밤중에 앰프를 바꾼다거나 소음을 잡자고 한바탕 난리를 칠 생각은 없으니 이럴 때는 역시 잡음이 두드러지지 않을 만한 적당한 음반을 선택하여 듣는 것이 최선이다.


 무더운 여름밤에 작게 들었을 때 아주 좋았던 음반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현악 삼중주 편곡반이었다. 원래 이 변주곡이 불면증에 시달리던 골드베르크 백작을 재우기 위해 작곡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내가 이 곡을 듣고 졸음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특히 명반으로 추앙받는 글렌 굴드의 다이내믹한 연주는 1950년대 연주건 1980년대 연주건 잠을 깨우면 깨웠지 결코 듣는 이를 느긋하게 풀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악 편곡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음질도 상당히 좋은 오르페오에서 발매된 음반으로, 바이올리니스트 드미트리 시트코베츠스키가 편곡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글렌 굴드를 추억하며' 라는 낭만적인 부제가 달려 있다. 에라토에서 활약하는 제라드 코세가 비올라, 유명한 미샤 마이스키가 첼로를 맡았는데, 아주 작게 듣는다면 우리 애호가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송진 가루가 흩날리는' 높은 고역이나 '가슴을 떨게 하는' 몸통의 울림은 느끼기 어렵겠지만,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 다정하고 따듯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같은 현악 삼중주 편곡반으로 오디오파일용 고음질 음반으로 유명한 타셋에서 발매된 게대 트리오(Gaede Trio)의 SACD도 괜찮은데, 템포의 변화가 심하고 다이내믹 레인지가 크며 깊은 저역이 잘 녹음되어 낮에 음량을 조금 올리고 듣기에 더 낫다는 생각이다.음질을 고려해서 한 장을 더 고르자면 역시 오디오 파일용 음반으로 유명한 도리안에서 발매된 를 꼽고 싶다. 바흐의 작품을 다른 악기로 편곡한 곡들을 여러 음반에서 발췌해 놓은 편집 음반으로, 특히 추천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트랙 -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노트북에서 G단조 폴로네이즈를 셀틱 피들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곡이다. 셀틱 피들을 연주한 로라 리스크(Laura Risk)는 클래식 연주자보다는 셀틱 민속 음악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으므로 이 곡은 그녀로서는 유별난 곡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편집 음반 외에 다른 음반으로는 발매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바이올린과 비슷하면서도 서늘하면서 애수에 깃든 음색은 한여름에도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조금만 참으면 아무리 지독한 여름이라도 곧 지나갈 것 같다. 그리고 먼 훗날엔 이 지독함마저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Monthly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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