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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릴 때
음악을 듣는다
최상균의 음질 좋은 에세이 1
글 최상균 2013-08-01 |   지면 발행 ( 2013년 8월호 - 전체 보기 )

 새벽부터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잠을 깨운다. 하지만 아직은 비몽사몽. 눈을 감은 채로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차분하게 '감상'한다. 몇 해 전 후드득후드득 창가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듣고서 델로니어스 몽크의 음악과 비슷하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생각할수록 빗소리는 음악과 참 많이 닮았다. 음악 중에서도 특히 오래 들어 '익숙한' 음악과 꼭 닮았다.익숙한 음악은 언제나 나를 그리운 시절로 돌려보낸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2악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대학 시절 캠퍼스의 큰 길을 활기차게 걷고 있다. 드뷔시의 야상곡을 들을 때면 비가 막 그친 소나무 숲, 우연이 가득한 숲길에 혼자서 이어폰을 꼽고 산책하는 내 모습이 보이고, 그때 가슴을 텁텁하게 하던 숲 냄새와 축축한 감각까지 고스란히 살아난다. 벗님들이 불러 히트했던 '사랑의 슬픔'을 들으면 실연을 당해 축 처진 어깨로 버스 창밖을 바라보는 청년의 쓸쓸한 모습이 보인다. 모차르트 교향곡 39번 3악장, 또는 라흐마니노프의 저녁 기도를 들을 때면 항상 석양이 창밖으로 아름답게 비춘다. 이런 느낌 속에서 삶은 영화처럼 아름답게 보이고, 그리운 음악들은 주제곡들이 된다. 돌이켜보니 내 '삶'이라는, 짧지 않은 드라마에는 수없이 많은 음악들이 지독히도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음악을 들으면서도 먼 훗날 이 곡을 다시 들을 때 어떤 추억으로 기억하게 될까 궁금하다. 기왕이면 좋은 추억이기를, 그리고 안온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오래된 음악처럼 빗소리도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오래된 음악이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것처럼, 빗소리를 들어도 언젠가 내렸던 어떤 비를 연상하게 된다. 네 살 때이던가. 다섯 살 때이던가. 소꿉친구와 처마 아래에서 손을 내밀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던 기억,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던 차가운 감촉. 그 감촉은 내가 비에 대해 느낀 첫 번째 감촉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비가 몹시도 많이 내리던 날 학교가 파하고 어떻게 하나 걱정할 때, 멀리서 웃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과 커다란 우산이 주던 행복. 중학교 때 친구들과 국립묘지에 동원되었다가 피할 곳 없이 비를 홀딱 맞고 거리를 활보하던 일. 어느 여고생 누나 역시 비를 피하지 못해 홀딱 젖어버린 모습을 보고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쿵쿵 뛰었던가! 이렇게 구체적인 기억은 평소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꽁꽁 숨어 있다가 빗소리에 '점화'되어 문득문득 떠오른다.


 이렇게 비와 음악이 비슷하기 때문인지 비가 올 때 음악을 들으면 마음의 동요는 절정에 이른다. 비에 대한 추억과 음악에 대한 추억들이 마구마구 교차하면서 마음이 들뜨고 설렌다. 습도가 높아 공기가 무거워지기 때문인지 오디오조차 음질이 좋아지는 듯하다. 실제로 잔잔한 빗소리는 음악에서 거친 고음을 마스킹해서 음악이 더욱 매력적으로 들리게 한다. 음악이 소위 마음에 착착 '달라붙기' 때문에 비가 오면 더 많은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다.나에게 있어서 비가 올 때 고르는 음악들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비가 어느 정도 내리는가, 계절은 어느 계절인가, 아침인가 저녁인가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가볍게는 샹송이나 칸초네를 가장 많이 듣는다. 질리오라 칭게티, 마리 라포레, 실비 바르탕, 프랑소와 아르디 등 그리운 가수들의 서정적인 노래들이다. 그리스의 국민 가수 하리스 알렉시우도 듣기 좋은데, 특히 'Patoma(비가 내리네)' 같은 곡은 빗소리가 아주 잘 녹음되어 있어서 맑은 날에 들어도 비가 내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 다만 이런 음반들은 대개 구하기도 쉽지 않고 음질이 좋은 것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음질까지 좋은 것을 뽑으라면 아그네스 발차의 를 꼽고 싶은데 '기차는 8시에 떠나네'와 같은 곡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요즘처럼 오랫동안 지루하게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몸과 마음이 축축하게 처질 때가 많으므로 대편성 관현악을 듣는 경우도 많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처럼 중후장대한 곡들은 한 곡을 듣기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자주 듣지 않지만, 빗소리와 함께 들으면 미시적인 요소에서 거시적인 요소까지 아주 잘 들린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비가 올 때는 이웃집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므로 음량을 평소보다 높여 들을 수 있어서 온 몸을 관통하는 통쾌한 울림을 만끽할 수 있다. 음악의 즐거움에 더해 오디오적인 쾌감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음악 처방을 내릴 때도, 좋아하는 음악을 몸이 떨릴 정도로 크게 들을 것을 권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 역시 브루크너로 '음의 샤워'를 하면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것 같은 상쾌함을 느낀다.


 그런데 브루크너의 음악은 워낙 편성이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판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지휘자의 개성이 너무나 강하게 표출된다. 예컨대 오디오 애호가들의 필청반 에 포함되어 널리 알려진 9번의 2악장 스케르초만 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 느낌이 너무나 달라진다. 이 곡을 개인적인 '음의 샤워' 용도로 쓴다면 단연 줄리니와 빈필의 연주를 최고로 꼽고 싶다. 금관 악기와 피치카토의 서주가 끝나고 팀파니가 처음 '따다당' 울리는 순간, 그 난폭하고 격렬한 총주에 깜짝 놀라게 된다. 크고 좋은 스피커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지만, 이때처럼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혹시 앰프에 베이스 조절 장치가 달려 있다면 베이스가 둔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올려 들으면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통쾌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스케르초 말고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는 귄터 반트, 첼리비다케를 즐겨 듣는데, 귄터 반트는 녹음이 섬세하고 따듯한 온기가 느껴져서 좋고, 첼리비다케는 묵직하면서 직선적인 매력이 있다.바람이 몹시 불면서 격렬하게 비가 내릴 때는 오히려 조용한 음악들을 듣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던 날 바깥 날씨와 어울릴 것 같은 격렬한 음악을 들어 보았더니 음악 소리와 바깥 소리가 서로 다투는 느낌이 들었고 어수선하게 엉키는 게 아주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사티의 피아노곡들을 들어 보았는데 의외로 너무 좋았다. 빈 곳이 유난히 많은 사티의 음악 덕에 가끔은 빗소리가 음악의 배경이 되고, 가끔은 음악소리가 빗소리의 배경이 된다. 나는 그때 사티가 생계를 위해 어수선한 살롱이나 카페에서 연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가 카페 같은 곳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이지만 음악 소리가 커지면 우리의 대화는 점점 커지고, 음악 소리가 작아지면 점점 작아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사티는 조용한 음악으로 주위의 소란을 컨트롤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사티의 음악과 주위 소음의 어울림은 대립이 아닌 서로 보완하며 어울리는 '상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이 카페의 소음보다는 빗소리나 바람 소리와 더 잘 어울릴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바깥은 격렬한 비와 세찬 바람. 하지만 내 공간에는 느릿느릿 아름답게 펼쳐지는 사티. 이 안락한 공간에 불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3극관 앰프라도 켜 놓을 수 있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 소소한 행복을 누구나 누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음악을 취미로 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Monthly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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